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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이야기 (을지로의 유래)

작성자
Youn ki sub
작성일
2023-09-19 18:13
조회
515

을지로는 서울 중구 소공동에서 신당동까지 동-서로 이어지는 약 3Km의 길이다. 을지로는 조선시대 구리개라고 불렀다. 얕은 언덕이 이어지는 길이 멀리서 보면 구리가 빛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순신 장군이 구리개 부근에서 태어났다. 명동 성당, 백 병원 부근이다.

구리개에는 한약방들이 많았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라고 할 수 있는 제중원도 구리개에 있었다. 원래 제중원은 지금의 헌법 재판소 과거 경기여고, 창덕여고 자리에 있었다. 집 주인은 갑신정변 주역으로 우정국 총판 홍영식의 집이었는데 갑신정변 때 역적으로 몰려 집안이 풍비박산 나서 재동 집이 비어 있었다. 치료비는 정부에서 지급할테니 질병 있는 자는 모두 와서 치료 받으라는 방을 4대문과 종각(광화문 교보문고 옆)에 붙였다.

환자가 몰려들어 장소가 비좁아지자 구리개로 이전했다.

왜놈들은 구리개를 황금정(고가네마치)이라고 불렀다. 구리나 황금이나 빛나는 물건임에는 틀림없다. 특히 명동 대부분, 퇴계로 일부는 본정(혼마치)으로 왜놈들 상권의 중심지였다.
또한 화교들도 소공동, 명동 일부, 북창동 등 을지로 입구에서 3가에 이르는 지역에 모여 살아 차이나 타운을 형성했다. 화교의 역사는 조선 말기 임오군란 때 청군이 들어오면서 일꾼들이 따라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지금 중국대사관 자리는 오장경이 임오군란 진압한다고  청군을 인솔해 들어와 주둔한 곳이다. 원래 이곳은 포도대장 이경하의 집으로 그때는 이경하 아들 이범진이 살고 있었는데 강제로 빼앗았다. 나중에 청나라 군대는 철수했으나 일꾼들은 이곳에 남았다. 화교들은 점점 늘어났다. 해방이 되자 북한에 살던 화교들도 공산당을 피해 남하해 이곳에 터를 잡았다. 화교들이 늘어나 상권이 위협받고 경제적 위상도 높아지자 정부는 화교의 기세를 누그러뜨려야겠다 고 생각했다.

1946년 일본식 동명을 정리할 때 정부에서 누군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화교의 기세를 꺾으려면 수나라를 크게 격파한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을 따서 을지로라고 이름 짓자. 그래서 황금정에서 을지로가 되었다. 왜놈들 상권의 중심지였던 본정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등장시켜 충무로가 되었다. “이놈들 혼 나봐라.”

중국대사관과 한성 화교 소학교가 나란히 있다. 하희라, 주현미가 이 학교 졸업했다. 그 뒤로 사보이 호텔이 있다. 전두환 일당이 군사반란 일으켰을 때 수도경비 사령관 장태완 소장이 진압군 병력을 사보이 호텔 부근에 전개해 반란군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반란은 성공하고 장태완 사령관은 반란군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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