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격동기의 어느 인생유전

작성자
niceguy
작성일
2023-10-03 21:11
조회
1185
민주호는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5살 때부터 한문 교육을 받았고 10살이 되어 통리기무아문에서 세운 동학당에 들어가 신학문과 영어를 배웠다. 그때 윤정식을 만났다. 윤정식은 민주호보다 2-3살 연상이었으나 둘은 친구처럼 지냈다.

민주호가 14살 되던 해 두 사람은 상해로 유학해 남 감리교에서 운영하는 중서서원에 입학했다. 그때 중서서원에는 윤치호가 다니고 있었다. 윤치호는 민주호보다 5살 연상이나 세 사람은 거의 매일 어울려 술을 마시며 시국을 논하기도 하고 놀려 다니기도 했다.
윤치호 일기에 의하면 민주호, 윤정식이 중서서원에 입학할 때 윤치호가 입학금 30달러를 빌려주었는데 결국 그 돈은 끝까지 돌려받지 못했다.

조선의 세도가 민영익이 원세개의 고종 퇴위 음모와 관련해 망명을 했다. 민영익은 천진을 거쳐 상해로 왔다. 상해에 잠시 머물던 민영익은 민주호, 윤정식을 데리고 홍콩으로 떠났다. 윤치호에게는 떠난다는 말도 없이.
윤치호는 그들이 인사도 없이 떠난 사실에 대해 일기에 섭섭함을 토로했다. “운미(민영익)가 민주호, 윤정식을 데리고 홍콩으로 떠났다. 운미가 말도 없이 떠난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민, 윤이 인사도 없이 떠나 섭섭하다. 사람의 정리가 어찌 그렇다 말인가? 내가 등록금 빌려준 돈 달라고 할까 봐 그냥 떠났을까?”

민영익을 두 사람을 통역 삼아 데리고 홍콩으로 떠났는데 민영익은 홍콩에서 최고급 호텔에서 머물려 호화생활을 했다. 고종은 망명하는 민영익에서 홍삼 전매권을 주었다. 민영익은 홍삼 판매 대금을 HSBC(홍콩 상하이 은행) 비밀금고에 보관했다.

1885년 12월27일, 홍콩의 프랑스계 할인은행에 조선인 두 사람이 나타났다. 민주호, 윤정식이었다. 두 사람은 은행 창구에 가서 액면가 37,000 달러 신용장을 내밀고 현금을 요구했다. 신용장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은행에서 현금을 준비하고 영수증에 서명 날인할 것을 요구했다. “도장이 필요한가요?” 민주호가 은행원에게 물었다. 신용장에 찍힌 도장과 똑 같은 도장이 필요하다고 은행에서 말했다. 민주호는 “도장 갖고 내일 다시 오겠다.” 면서 태연히 은행을 나섰다.

다음 날 다시 은행에 온 민주호 윤정식은 영수증에 서명날인하고 37,000달러를 찾아 은행에서 나왔다. 그 당시 37,000달러면 현재 수백만 달러에 해당하는 큰 돈이다. 두 사람은 돈을 찾아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탔다. 일본에 도착한 두 사람은 김옥균을 만나 앞날을 상의했다. 김옥균은 두 사람에게 변수를 소개했다.

변수는 22살 때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미국의 배려로 세계일주를 한 사람이다. 그는 갑신정변 때 김옥균과 함께 참여했던 급진 개화파로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동료들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 중이었다. 두 사람은37,000달러에서 4,000달러를 김옥균에게 주었다. 민주호, 윤정식은 변수와 함께 미국 가는 기선에 올랐다.

한편 홍콩에서는 난리가 났다. 민영익이 할인은행에 나타나 예금한 돈을 찾으려 했는데 이미 누군가 찾아간 후였다. 민영익은 내 돈 찾겠다 하고, 은행에서는 찾아 갔다 하고. 민영익은 변호사를 통해 소송을 제기했다. 법정에서는 민영익의 손을 들어주었다.

홍콩 할인은행에서는 프랑스 본점에 사건을 알렸고 프랑스에서는 조선 정부에 공식 항의했다. “조선인 민주호, 윤정식이 범인이니 책임지라.”

변수와 함께 미국에 도착한 민주호, 윤정식은 나란히 어학 학교에 입학해 영어를 더 배우고 메릴랜드 농과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윤정식은 학업에 뜻이 없어 자기 몫의 돈을 달라 해서 돈을 흥청망청 다 써버렸다. 변수는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갔을 때도 농업과 화학에 흥미를 느껴 농업과 화학을 공부한 적이 있다.

변수, 민주호, 윤정식 모두 범죄자다. 변수는 정변에 실패한 역적이고 민주호, 윤정식은 사기 횡령범이다. 두 사람이 미국에 있는 것을 안 조선정부는 두 사람을 송환하라고 요구했으나 미국은 거부했다. 당시에는 범인 인도 조약도 없었고 “두 사람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조선에 가면 조선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송환을 거부했다.

주미공사 박정양은 두 사람에게 귀국을 설득했다. “너희들은 미성년자라 귀국해도 처벌받지 않으니 귀국하라.”  민주호, 윤정식은 귀국했다. 홀로 남은 변수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메릴랜드 농과대학을 졸업해 농림부에 취직을 했다. 농림부에 취직한지 3개월만에 변수는 통근하는 기차에 치어 세상을 떠났으니 겨우 30살이었다.
23살 젊은 나이에 조선의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의 꿈을 이루고자 정변에 참여했다 실패해 망명했던 그는 미국에서 선진문물을 공부해 꿈을 이루고자 했으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머나먼 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윤정식은 귀국 후 갚아야 할 돈을 갚지 못해 족징(가족이나 친척들이 대신 갚아 주는 것)으로 갚았다고 전해진다. 그 후 윤정식의 행적은 찾을 길이 없는데 그는 조선시대 커피를 처음 마셔본 사람 중에 한명이다. 기록에 의하면 1884년 6월-7월, 그는 상하이 가는 길에 부산에 들러 중국인 집에서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가 민주호와 함께 상해로 유학 가기 직전이었다.

민주호는 귀국 후 자신이 갚아야 할 몫의 돈을 갚고 이름을 민상호로 개명했다. 그는 독립협회에도 관여했고 관직도 맡았다. 그는 개화파 중에서도 친미파로 민영환, 윤치호, 이상재, 서재필, 이완용과 함께 정동 구락부 멤버였다.

을미왜변으로 민 왕후가 왜놈들에게 시해당하자 고종을 친일파 손에서 빼 내려는 춘생문 친위 쿠데타에도 참여했다. 춘생문 사건은 내부에 배신자가 생겨 실패했으나 그 후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덕수궁 바로 뒤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 1년을 머물렀다.

민상호는 친미 반일 주의자였으나 일제가 조선을 병합할 때 협조해 남작 작위를 받은 반역 행위를 했다. 그후 친일로 일관하다 1933년 세상을 떠났다.

친구 민상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윤치호는 “나는 소녀처럼 예쁜 14세 민상호를 상해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 민상호만 기억에 있다.”면서 슬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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